시스템과 상호의존성 - 사회과학분야-

작성자
eco-research
작성일
2015-02-10 11:06
조회
424
 

사회과학에서의 시스템과 상호의존성


장  덕  진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교수)


목  차

 

Ⅰ. 정체성과 발현성, 혹은 행위와 구조

Ⅱ. 미시-거시 연계를 향한 노력들

III. 정체성과 상호의존성

IV. 행위와 상호의존성

V. 구조적 발현과 상호의존성





  Ⅰ. 정체성과 발현성, 혹은 행위와 구조


    You are what you eat.

    You are who you know.


  두 개의 짧은 인용문으로부터 이 글을 시작하고자 한다. 앞의 것을 직역하면 “당신이 먹는 음식이 곧 당신이다”는 뜻이고, 뒤의 것을 직역하면 “당신이 누구를 아느냐가 곧 당신이다”는 뜻이 될 터이다. 앞의 것은 음식물 섭취에 민감한 사람들이나 영양학자들 사이에 많이 회자되는 경구이고, 뒤의 것은 사람들 사이의 관계로부터 그 사람의 정체성을 찾고자 하는 사회과학자들 사이에 오가는 명제이다. 영양학과 사회과학 사이에 꽤 멀찌감치 떨어진 거리감에도 불구하고, 두 인용문의 공통점은 “정체성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정체성의 문제란 무엇인가. 쉽게 말해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사회적 자아를 어느 정도 완성하게 되는 사춘기에 많은 사람들이 방황하게 되는 것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가 만만치 않은 일인데다가, 그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대답을 찾지 못하면 더 이상의 삶이 무의미해질 정도로 삶의 전제가 되는 존재론적 질문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자신에게만 국한하여 찾는다면 보통 사람의 고민이 될 것이고, 특정한 개인으로서의 나 뿐만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든지 ‘일반화된 나’로 확대하여 찾는다면 사회과학자의 인식론이 될 것이다. 사회과학에서의 시스템과 상호의존성을 논의하기 위해 꼭 필요한 두 개의 축 중에 하나는 바로 이 정체성의 문제이다.

  다른 하나의 축은 발현성(emergence)의 문제와 연관되어 있다. “전체는 부분의 총합과 같지 않다”는 뒤르케임(E. Durkheim)의 유명한 명제에서 보듯이, 개인들의 정체성을 어디에서 찾든지 간에 그 개인들이 모여서 이루어내는 집합적 특성은 그것을 구성하는 개인들에게로 환원할 수 없는 초개인적(supra-individual) 성격을 갖게 마련이다.

  사회과학은 사회를 구성하는 개인들이 누구인지, 그리고 그들이 모여 어떤 세상을 만들어내는지를 설명하는 학문이기 때문에 정체성의 축과 발현성의 축을 동시에 포괄할 수 있어야만 한다. 필자가 보기에 이러한 시도는 제도적 개인주의의 과학철학적 설명 프로젝트에서 시작하여 합리적 행위이론과 연결망 분석을 거쳐 향후 시뮬레이션을 통한 복잡계 연구로 이어져 가는 듯 하다. 이 글은 방금 언급한 경로들이 왜, 어떻게 이어지는지를 간략히 설명하는 것을 그 목적으로 한다.




  Ⅱ. 미시-거시 연계를 향한 노력들


  그 동안 사회과학 내부에는 적절한 설명의 방법이 무엇인지를 찾아내려는 다양한 시도들이 있어왔다. 미시-거시 연계(micro-macro link)를 위한 본격적인 노력이 이루어지기 전까지의 이러한 시도들은 크게 보아 구조적 특성으로부터 사회현상을 설명하려고 하는 집합주의적 전통과 개인의 속성으로부터 사회현상을 설명하려고 하는 개인주의적 전통으로 나눌 수 있다. 이러한 두 가지 전통과 더불어 새롭게 등장한 미시-거시 연계의 입장을 한꺼번에 잘 요약해주고 있는 것이 다음 <그림 1>이다.

            

<그림 1: 사회과학에서의 설명의 논리틀>


  <그림 1>에서 W는 ‘전체(whole)'의 약자이고, e는 ’부분(element)'의 약자이며, 시간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흐르고 있다. 따라서 A(W)와 B(W)는 거시적이고 구조적인 차원의 사건들이고 a(e)와 b(e)는 미시적이고 개인적인 차원을 지칭한다. 여기에서 궁극적인 설명의 대상이 되는 사회현상은 B(W)이다. 또한 y는 B(W)로 인해 발생되는 어떤 우호적 결과를 나타낸다. 이렇게 정리해 보면 우리는 <그림 1>로부터 최소한 다섯 가지의 서로 다른 설명논리를 찾아낼 수 있다. 예를 들어 거시적-구조적 현상인 B(W)를 설명하기 위해 다른 어떤 요소에도 의존하지 않고 시간적으로 선행하는 거시적-구조적 현상인 A(W)에만 의존하여 설명하고자 하는 시도는 전체적 구조주의에 해당하며, 이러한 시도는 <그림 1>에서 경로 a를 따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반면 그 궁극적인 원인이 무의식적 심층구조에 있건 아니면 생리학적 구조에 있든 간에 거시적 사회현상의 ‘기저’에 존재하는 ‘깊은 구조(deep structure)'를 찾으려는 시도인 h-i의 경로는 변형적 구조주의의 설명틀을 보여준다. 세 번째로 거시적 사회현상인 B(W)가 어떤 우호적 결과인 y를 낳고, 그러한 우호적 결과로 인해 거시적 사회현상 B(W)가 존재한다는 기능주의적 설명은 e-f-e-f-의 순환적 경로를 따른다. 네 번째로 g-c 혹은 g-c-d로 이어지는 심리학주의 설명에서는 개인의 행위를 설명하는데 있어서 구조의 맥락적 효과보다는 순수 개인적 요인에 더 치중하고, 거시적 현상을 설명하고자 하는 경우에도(d) 발현성을 인정하지 않는 경향을 보인다.

  제도적 개인주의는 사회과학이 추구해온 이러한 네 가지 설명이 모두 한계를 가질 수 밖에 없음을 인식하고, 미시 수준의 설명과 거시 수준의 설명을 결합하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제도적 개인주의가 추구하고자 하는 b-c-d의 경로를 따라가 보면, 우리는 사회과학적 이론 구성의 주요 쟁점들이 모두 이 안에 축약되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먼저 경로 b의 경우, 개인의 정체성과 행위에 영향을 미치는 구조적 혹은 맥락적 효과를 다루고 있는 부분으로서 ‘사회화(socialization)'와 같은 사회학의 기초 개념들에 잘 나타나 있다고 할 수 있다. 두 번째로 경로 c는 주어진 구조의 강압 하에서 인간의 행위가 무엇에 의해 결정되는지를 다루는 부분으로서, 소위 행위이론을 둘러싼 논쟁의 영역이다. 경제학의 합리적 행위 이론과 사회학의 역할 행동 같은 이론들 사이의 논쟁이 대표적인 예이다. 세 번째로 경로 d는 c에서 주어진 행위의 규칙이 무엇이든 간에, 수많은 개인들의 행위가 모여서 미시적 차원에서는 찾을 수 없는 구조적 발현성을 나타내는 과정에 대한 연구이다.




  III. 정체성과 상호의존성


  앞에서 소개한 제도적 개인주의의 설명방식을 따라가고자 할 때 제일 먼저 부딪히는 경로는 경로 b이고, 이것은 인간의 정체성이 어떻게 형성되느냐의 문제이다. 이것은 또 다시 여러 개의 하위 논쟁으로 이어질 수 있겠으나, 여기서는 가장 초보적인 문제이면서 이번 포럼의 주제이기도 한 ‘상호의존성’의 문제에 국한하여 논의하기로 하겠다. 인간의 정체성은 독자적으로 형성되는가 혹은 상호의존적으로 형성되는가? 독자적인 것이든 상호의존적인 것이든, 그것은 ‘어떻게’ 형성되는가?

  미시와 거시를 통합한 사회과학 이론을 만들려고 할 때 연구자는 필연적으로 행위에 대한 이론을 필요로 하게 되고, 행위에 대한 이론은 인간이 무엇을 원하는가, 즉 ‘욕구(desire)'에 대한 이론을 그 핵심적인 내용으로 가지게 된다. 예를 들어 최적화 행위(optimization behavior)라고 하는 경제학적 행위 이론은 효용극대화(utility maximization)라고 하는 욕구에 대한 이론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이다. 사회과학에서 가장 표준화된 행위이론을 가지고 있는 경제학의 예를 들어보자. 효용을 극대화하는 것이 욕구에 대한 경제학의 이론이라고 할 때, 그 효용은 어디에서 주어지는가? 즉 경제학적 용어로는 ’선호(preference)'는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경제학자들은 보통 선호는 ‘외생적(exogenous)'인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다른 말로 선호는 시스템의 외부로부터 주어진다는 뜻이고, 주어진 시스템을 분석하는 경제학의 학문적 경계 내부에서는 선호의 형성을 알 수 없다는 뜻이 된다. 이 주장을 <그림 1>의 경로에 대입시켜보면 경로 b에 대해서 적어도 표준적인 경제학은 설명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말이다. 개인이 무엇을 욕구할지는 알 수 없지만, 일단 욕구가 주어지고나면 그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최적화 행위인 경로 c와 그를 통해 시장균형에 도달하는 과정인 경로 d에 대해서는 경제학이 잘 설명할 수 있다는 전략인 셈이다.

  그러나 경제학자들을 제외한 많은 사회과학자들은 이 주장에 대해 동의하지 않았다. 사람들의 선호가 그들이 속해 있는 구조적 맥락에 의해서, 혹은 상호간의 영향에 의해서 상호의존적으로 형성되는 것이 현실 속에서 눈에 보이는 데도 불구하고 모델링하기 어렵다고 해서 그것을 포기하는 전략에 쉽게 동의할 수 없었던 것이다. 예를 들어 <그림 2>를 생각해 보자. 20대 여성에게 유행하는 새로운 패션 아이템에 대한 광고를 두 지역에서 행하였다고 가정하자. 지역 A는 압구정동과 같은 패션 중심지이고, 지역 B는 드라마 ‘전원일기’에 등장하는 양촌리와 같은 마을이라고 하자. 광고에 많은 투자를 할수록 매출이 조금이라도 늘어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일 것이고, 문제는 매출 증가 곡선의 기울기이다. 누구나 예측할 수 있듯이, 지역 B보다는 지역 A에서 매출 증가가 훨씬 급격히 일어나게 된다. 그 이유는 패션에 민감한 수많은 20대 여성이 활보하는 압구정동에서는 새로운 패션을 남들보다 뒤늦지 않게 채택해야 한다는 압력(peer pressure)이 훨씬 강하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양촌리의 아마도 유일한 20대 여성인 복길이는 매스컴을 통해 받는 압력 이외에는 적어도 같은 동네에서 타인으로부터 받는 압력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지역 B에서의 매출액 증가 곡선은 매우 완만하게 나타난다. 이러한 예는 선호가 상호의존적으로 결정된다는 단적인 증거이기도 하다.


      

<그림 2: 유행 패션에 대한 광고비와 매출액 사이의 관계: 두 지역의 비교>


  그렇다면 문제는 이와 같은 상호의존적 선호형성을 어떻게 구체적으로 모델링할 것인가이다. 크랙하트는 다음과 같은 모델을 제시한 바 있다(Krackhardt 1998).


<그림 3: 선호형성을 위한 영향력 행렬>


PICFA.gif..........(1)

PICFB.gif ...........................(2)


단, Ut = 시간 t에서 행위자 i의 선호

    w = 가중치

    xij = 행위자 i와 행위자 j 사이의 상호작용의 정도


식 (1)은 시간 t에서 행위자 i의 선호는 그보다 앞선 시간 t-1에서 자신을 포함하여 시스템 내에 속하는 모든 행위자들의 선호의 함수이며, 각각의 행위자들은 서로 다른 정도의 가중치를 가지고 시간 t에서의 나의 선호형성에 영향을 주게 됨을 뜻한다. 식 (2)는 가중치가 정해지는 방식을 규정하는 것으로서, 행위자 j가 행위자 i의 선호에 미치는 영향력의 크기는 i와 j가 함께 보내는 시간에 비례하고 j가 스스로를 포함한 다른 행위자와 함께 보내는 시간의 총량에 반비례함을 말하고 있다. 이때 주목할 것은 이 식에서 어떤 사람의 경우에는 wii = 1이고 i ≠ j 인 모든 wij = 0일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다는 점이다. 이 특수한 경우가 바로 경제학에서 말하는 외재적 선호인 것이며, 따라서 외재적 선호는 내재적 선호라는 보다 일반적인 형태의 한 특수한 경우가 된다.




  IV. 행위와 상호의존성


  제도적 개인주의의 설명방식에서 두 번째 경로는 인간의 행위규칙을 설명하는 경로 c가 된다. 인간의 행위가 과연 어떤 원칙을 따라 이루어지는가에 대한 논쟁은 그동안 수없이 있어왔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논쟁은 아마도 인간 행위의 합리성 여부를 둘러싼 논쟁이었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아래에서 설명하듯이, 필자가 보기에 이 논쟁의 핵심은 사실상 합리성 여부에 대한 논쟁이라기보다는 타인과의 상호의존성 여부에 대한 논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림 4>는 표준적인 신고전경제학의 최적화 행위를 도표로 나타낸 것이다.


                 

<그림 4: 모수적 합리성에 따른 선택>


  표준적인 신고전경제학에서 사람들은 두 가지의 상수항을 놓고 선택을 하게 된다. 하나는 자신의 선호인데 이것은 <그림 4>에서 무차별 곡선(indifference curve)으로 나타나 있고, 다른 하나는 예산제약(budget constraint)으로서 이것은 우하향의 직선으로 표시되어 있다. 자신의 만족을 극대화하기 위해 X1과 X2라는 두 개의 재화를 각각 얼만큼 소비하는 것이 최적인가? 그림에서 보듯이 X1*만큼의 X1과 X2*만큼의 X2를 소비하는 것이 최적이고, 이것이 곧 합리적 행위가 된다. 그러나 때때로 말해지는 것보다 말해지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한 의미를 가질 수 있듯이, 수식과 그래프로 표현되는 경제학적 행위이론의 배후에는 그보다 더 중요한 사회과학적 가정들이 말해지지 않은 채로 숨어있다. 하나는 사람들이 실제로 ‘행위’할 공간이 없다는 점이다. 시스템으로부터 외생적으로 주어진 선호가 존재하고, 주어진 예산이 있을 때 합리적인 행위는 수학적으로 결정된다. 즉 합리적인 행위는 실제로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애니메이트 되는 것이고, 이런 의미에서 일부 과학철학자들은 경제학적 행위를 ‘행위(action)'가 아닌 ’애니메이션(animation)'이라고 부르기조차 한다. 밀튼 프리드만이나 게리 베커와 같은 신고전경제학의 핵심 계보에 있는 학자들이 공통적으로 “인간이 실제로 그러한 합리적 행위를 한다는 것이 아니라 ... 비합리적 행위를 지속적으로 할 경우 시장에서 퇴출된다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보면, 연역적으로 도출되는 당위로서의 합리적 행위를 현실 속에 존재하는 실재로서의 합리적 행위로 바꾸어 놓는 과정은 아직까지 그다지 명쾌하게 해결되지 못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말해지지 않은 채로 있는 또 하나의 중요한 가정은 <그림 4>가 상정하고 있는 ‘사회구조’의 모습이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과 상호작용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선호에 영향을 미치지도 않으며, 오직 시장에 대한 모든 정보를 담고 있는 단 하나의 모수(parameter)인 가격만을 주목한다. 이와 같은 이유 때문에 필자는 <그림 4>의 합리성을 ‘모수적 합리성(parametric rationality)'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림 5: 부부싸움게임(battle of the sexes)의 Payoff Matrix>


  또 하나의 합리성 개념은 신제도경제학과 게임이론에서 널리 사용되어진 ‘전략적 합리성(strategic rationality)'이다. 이 개념은 <그림 5>에 나타난 부부싸움 게임의 예를 통해 쉽게 설명할 수 있다. 모처럼의 부부동반 외출을 하려고 할 때, 남편은 권투 경기에 가는 것을 선호하고 아내는 발레 관람을 원한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함께 보러 가면 자신은 5만큼의, 그리고 상대방은 4만큼의 만족을 얻는다. 결국 합의에 도달하는데 실패하여 남편은 권투를, 아내는 발레를 보러간다면 자신이 원하는 것을 보기는 했지만 모처럼 부부동반 외출의 의미는 없어졌으니 각각 1만큼의 만족 밖에 얻지 못할 것이다. 어처구니 없는 일이지만, 만약 다투던 끝에 남편은 발레를, 아내는 권투를 보러가게 된다면 어떠한 만족도 없을 것이고 따라서 이들이 얻는 만족의 양은 모두 0이다. 상대방이 어떻게 나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남편과 아내는 각각 어떤 선택을 해야 할 것인가. 약간의 말다툼 끝에 먼저 아내가 양보하기로 마음먹고 권투를 선택했다고 하자. 이 경우 남편이 동의해주면 다행이지만, 이미 남편은 맘이 상할대로 상해서 자기는 발레를 보러 가겠다고 가버린다면 아내의 좋은 의도와는 달리 만족은 0이 되고 만다. 이것은 남편도 마찬가지이다. 이 예가 보여주는 것은 사람들은 자신의 운명의 일부분 밖에는 선택하지 못하며, 우리의 운명은 상호의존적으로 결정된다는 점이다. 아내는 자신이 4의 만족을 얻고 남편에게 5의 만족을 주기 위해 권투를 선택했지만, 과연 그렇게 될지 아니면 둘 다 0으로 끝날지는 남편의 선택에 달린 것이다. <그림 5>에서 윗줄로 갈지 아래 줄로 갈지는 아내의 선택이지만 왼쪽 줄로 갈지 오른쪽 줄로 갈지는 남편의 선택인 것이고, 이 둘의 조합에 의해 공동의 운명이 선택되는 것이다. 즉 전략적 합리성이란 선택을 하기에 앞서 상대방의 선택까지도 염두에 두고 해야만 하는 합리성인 것이다. 전략적 합리성은 상호작용하는 상대방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의 합리성까지를 고려하며, 최종적인 결과는 상호의존적으로 결정된다는 점에서 모수적 합리성보다는 좀 더 사회과학의 상호의존적 성격을 잘 드러내는 개념이다.

  그러나 이자(dyad) 사이의 상호의존성만을 가지고는 진정한 의미의 시스템이라고 부르기에는 한계가 있을 것이다. 짐멜이 말하듯이, 진정한 의미의 사회적 과정은 삼자(triad) 이상의 관계에서 비로소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때문이다. 흔한 예로서 ‘친구의 친구’와 ‘적의 적’, 그리고 ‘적의 친구’와의 관계를 생각해 보자. 이중에서 나와 가장 쉽게 친구가 될 수 있는 것은 친구의 친구이다. 두 번째로 쉽게 친구가 될 수 있는 것은 나와 공통의 적을 가지고 있는 적의 적이다. 가장 친구가 되기 어려운 것은 적의 친구이다. 이제 내가 어떤 사람과 친구가 될 것인지 적이 될 것인지를 결정하기 위해서는 나와 상대방 뿐만 아니라 제3자까지 고려해야만 하는 것이다. 최근 많은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는 네트워크 분석은 이러한 다자 사이의 관계를 가장 체계적으로 측정하고 분석하는 방법을 제공하고 있다.

                   

<그림 6: 연결망 제약도와 학습성취도 사이의 관계>


  <그림 6>은 연결망 분석의 주요 개념 중 하나인 제약도(network constraint)와 고등학생들의 학업성취도 사이의 관계를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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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약도는 보통 위의 식으로 표현되는데, 행위자 i가 행위자 j에게 투자하는 관계적 시간과 에너지의 총합을 pij라고 한다면 ji에게 가하는 제약의 총합인 cijj에 대한 i의 직접적 투자와 여러 명의 q를 통해 이루어지는 j에 대한 간접적 투자가 합쳐진 만큼이라는 뜻이 된다. 이 공식에 따르면 소수의 사람에게 강하고 밀도 높은 관계를 유지하는 행위자는 그만큼 네트워크로부터 오는 제약을 많이 받게 되고, 반면 다수의 사람과 밀도 낮은 관계를 유지하는 행위자는 제약을 덜 받게 됨을 알 수 있다. 행위의 맥락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적어도 도구적인 행위의 맥락에서는 제약도는 종종 성과와 깊은 관계를 맺게 된다. 그라노베터의 잘 알려진 연구인 “약한 연계의 힘(The Strength of Weak Ties)”의 주장과 일치하는 결과인 셈이다. 실제로 한국의 고등학생들을 대상으로 친구관계의 연결망을 조사하여 제약도를 계산하고, 그것과 학습성취도와의 관계를 분석한 결과인 <그림 6>은 이러한 이론적 예측이 상당히 잘 들어맞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 예에서 더 이상 행위자는 구조 속에 혼자 고립되어 있지 않고 다수의 사람들과 적극적 관계를 맺고 있으며, 다른 행위자들도 마찬가지이다. 이들의 행위나 선호는 시스템 외부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시스템에 대해 내생적이며, 이들의 운명은 철저하게 상호의존적으로 결정된다.




  V. 구조적 발현과 상호의존성


  제도적 개인주의 설명 전략의 마지막 경로, 즉 경로 d는 수많은 사람들의 행위가 모여 어떠한 구조적 발현을 나타내는지를 설명하고 예측하는 부분이다. 소위 미시에서 거시로 가는 ‘합산규칙(aggregation rule)’을 찾을 수 있느냐의 문제인 셈이다. 사실상 발현성이라는 개념이 가지는 엄청난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사회과학이 찾아낸 합산규칙은 극히 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앞서 소개한 모수적 합리성으로부터 출발하여 찾아낸 것이 ‘파레토 균형(Pareto equilibrium)’이라면, 전략적 합리성으로부터 출발하여 찾아낸 것은 ‘내쉬 균형(Nash equilibrium)’을 비롯한 일련의 게임이론적 균형 개념들이다. 필자가 이 글에서 소개한 관계론적 시각은 어떠한 합산규칙을 찾을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아직까지 분명히 제시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매우 가능성 높은 한 가지 대답이 사회과학적 시뮬레이션, 특히 ABM(Agent-Based Modeling)에 있다고 본다. 초창기 악셀로드의 ‘협동의 진화(evolution of cooperation)’ 등의 연구를 통해 알려지기 시작한 사회과학적 시뮬레이션은 최근 들어 어지러울 정도로 빠른 속도로 발전하고 있다. 이는 사회를 하나의 균형점으로 보기 보다는 애초에 균형이 존재하지 않는 복잡계(complex system)로 보고, 동질적이거나 혹은 이질적인 행위자들(agents)이 단순한 규칙에 따른 행위를 반복함으로써 자기조직적(self-organizing)으로 얻어지는 거시적 발현성을 찾아내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비교적 잘 알려진 예로서, 엡스타인과 액스텔(Epstein and Axtell 1996)의 인공 사회(artificial society) 연구를 소개하기로 하자. ‘슈가스케이프(sugarscape)’라 이름 붙여진 인공 사회는 가로 50, 세로 50의 정방형 격자 위에 만들어진다. 연구자는 그 위에 자기가 원하는 대로 자원(이 연구에서는 설탕)을 분포시키고, 자원의 재생산주기를 설정하며, 다양한 유전적 특성을 가진 행위자들(멀리 있는 자원을 볼 수 있는 시력, 한 칸 이동하는데 필요한 신진대사, 수명 등)을 분포시킨 후 이들에게 “가까이 있는 자원으로 이동해서 먹어치워라”는 식의 간단한 행위규칙을 부여한다. 현실 속의 사회를 되살린 것이라 하기에는 너무나 단순한 이러한 연구에서 놀랍게도 우리는 거시적 차원에서 우리의 현실 사회에 매우 근접하는 결과들이 나타나는 것을 보게 된다. 예를 들면 초기에 무작위적으로 분포되었던 부의 축적은 일정 시간이 지나고나면 부익부 빈익빈의 현상을 보이게 되며, 에이전트들이 축적한 설탕량의 지니계수는 현실 사회에서 우리가 부딪히는 지니계수와 거의 근접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부의 불평등이 자본주의의 속성이라는 주장은 상당히 디스카운트 해서 받아들여야 하는 주장이라고 볼 수도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ABM을 활용한 특정 연구에서 얻어진 특정 결론의 내용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접근이 현실 속에 존재하기 어려운 엄격한 행위 기준을 요구하는 것도 아니고, 모든 인간이 같은 규칙에 따라 행동할 것을 요구하지도 않고, 비슷한 경험이 반복됨에 따라 학습을 통해 행위규칙이 바뀌는 것조차 허용하면서도 동시에 그로부터 발현적으로 얻어지는 거시적 결과를 잘 보여주고 있다는 데에 있다. 이것은 그동안 사회과학이 목마르게 기다려왔던 합산규칙들을 비현실적 가정 없이도(혹은 다양한 가정들을 동시에 허용하면서도) 만들어낼 수 있을 가능성을 열어주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기대되는 향후 연구방향은 ABM과 연결망 분석의 결합이다. 경로 b와 경로 c에 대한 우리의 논의는 합산규칙에 있어서도 상대방의 정체성에 대한 고려가 반드시 들어가야 함을 제시해주고 있다. 시뮬레이션을 통해 누구와 관계를 맺고 누구와 관계를 끊을 것인지를 예측할 수 있게 되면 우리는 비로소 행위자의 다양성 뿐만 아니라 행위의 대상에 따라서도 변화하는 행위규칙을 수용할 수 있게 될 것이고, 그때에 이르면 경로 b-c-d를 이으려는 제도적 개인주의의 설명 프로젝트도 완결될 수 있을 것이다.



























토론문


생태학에서의 시스템과 상호의존성


송 인 주 (서울시정개발연구원 부연구위원)



  1. 들어가는 글


  생태학(ecology)은 생물과 그것을 둘러싼 환경과의 상호작용을 연구하는 학문이고 생태학 연구의 기본단위가 생태계(ecosystem)라는 것을 상기하면 생태학이라는 학문 자체를 시스템과 상호의존성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영국의 식물학자인 탠슬리(Arthur Tannsley, 1871~1955)는 1935년 생물적 구성요소와 무생물적 구성요소를 하나로 묶어서 생각할 수 있도록 생태계라는 용어를 제창했다. 생태계는 물질순환과 에너지 흐름을 통하여 생물과 환경(생물적 요소와 무생물적 요소)이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생태계는 열린계(open system)로서 생태계의 일반적인 모습과 기본 기능들은 장기간동안 변화가 없는 듯이 보이지만 무엇인가 끊임없이 생태계로 들어오면서 동시에 나가는 동적인 시스템이다. 본 토론에서는 두 가지 측면에서 논의를 하고자 한다; 첫째, 생태계라는 시스템의 특성과 생태계 내부 요소들 간의 상호의존성, 둘째 최근 인구증가와 이로 인한 토지이용으로 급격히 늘어난 도시생태계를 중심으로 한 생태계들 간의 상호의존성.


     생물군집 +환경 = 생태계




  2. 생태계의 상호의존성


  생물계(biosphere)는 지구상에서 생물이 살아가고 있는 영역을 의미하며 가장 큰 생태적 공간단위이다. 이것은 서로 상호작용을 하는 동적상태를 포함하고 동시에 지구생태계로 이해될 수 있다. 지구상에서 쉽게 인지되는 생태계의 유형은 해양생태계, 담수생태계, 육상생물군계, 농경생태계, 도시생태계 등이다. 이것은 크게 자연생태계와 인공생태계로 대별될 수도 있다.

생태계의 생물구성요소는 광합성과정을 통하여 태양에너지를 고정하는 일반적인 녹색식물인 생산자와, 다른 생물을 먹이로 하는 소비자로 나눌 수 있으며 소비자에는 세균, 곰팡이와 같이 유기체를 분해하는 분해자가 포함된다. 이러한 구성원들은 먹이그물(food web)이라 불리는 에너지 이동의 얼개에서 서로 밀접하게 연관이 되어있다. 또한 유기체와 환경사이를 오가는 화학원소들의 순환경로를 생지화학적순환(biogeochemical cycle)이라 부른다. 생태계라는 시스템에서 다양한 생물들 간에 그리고 이러한 생물들은 다시 주변 환경과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어서 이들 고리들이 원만히 연결되어 있을 때 시스템은 안정화되며 지속적으로 발전할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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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생태계의 물질순환




  3. 자연생태계-농경생태계-도시생태계


  다양한 생물군집 및 환경을 나타내고 있는 자연생태계는 오늘날 인위적 영향으로 심각하게 위협받고 있으며, 동시에 자연생태계 및 농경생태계가 도시로 전환되어 도시생태계가 빠른 속도로 증가하고 있다. 자연생태계, 농경생태계, 도시생태계는 각각 특성을 가지고 있다. 자연생태계가 발전하면 안정적이 되어 물질순환이라는 측면에서 폐쇄적인 시스템으로 진행되는 반면 농경생태계는 태양에너지이외의 보조에너지원이 동력으로 공급되고 인간관리로 종다양성이 감소하며 독립영양생태계라는 특성이 있다. 최근 농경생태계의 화학오염물질과 토양침식으로 대기, 수질, 그리고 다른 자연생태계에 미치는 영향이 심각하게 증가하고 있다. 도시생태계는 대부분 생태계의 기반이 되는 생산자가 없어 외부에 막대한 의존을 하게 된다. 도시생태계와 농경생태계의 가장 큰 차이점은 도시생태계가 종속영양적이라는 것이고 도시생태계는 자연경관과 농촌경관을 기반으로 존재하는 기생자이다.

도시가 인위적인 이용에 의해 그 공간 원래의 모습은 변형되었지만 자연은 도시의 구성원으로서 다양한 형태로 도시 속에 내재되어있다. 도시생태의 특징은 도시의 새로운 환경특성에 맞게 새롭게 이주한 여러 동식물이다. 도시생태계가 외부의 다른 생태계에 의존하는 시스템이지만 도시 안에서는 자연생태계에서와 마찬가지로 생물종과 비오톱(Biotop, 그리이스어원으로 특정 생물군집의 공간적 경계를 가지는 서식지로 고유한 속성을 나타내며 다른 환경과 분리될 수 있다)간의 상관관계가 나타나고 있다. 비오톱은 생태계 경계의 모호함을 보완하여 생태연구 및 공간관리에 많이 쓰이고 있으며 특히 도시에서의 비오톱은 생태적인 도시 관리를 위한 기초로 많이 활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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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도시, 농촌, 자연의 상호의존




  4. 안정과 발전을 위한 상호작용


  주어진 생태계는 생태계 내부 구성원들의 상호작용이 활발하고 안정적으로 이루어질 때 그리고 나아가 이러한 생물구성원과 그들을 둘러싼 환경과의 상호작용(순환)이 원활히 이루어 질 때 시스템이 안정적으로 발전을 하게 된다(생태적 천이). 동시에 이러한 시스템들간의 상호작용이 시스템안정화와 지속성에 기여하는 바도 크다. 앞서 설명하였듯이 자연생태계의 경우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안정적이고 폐쇄적인 시스템으로 발전한다. 내부완결성을 갖는다는 의미다. 그러나 인간의 생활터전인 도시는 구조적으로 폐쇄적인 시스템으로는 유지가 불가능하다. 도시는 항상 인접생태계와 연결성을 가지고 이를 유지해야 발전해 갈 수 있으며 우리가 도시 주변의 자연을 보호해야하는 것도 우리의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한 절실한 전략일수 밖에 없다. 도시계획 및 관리는 도시내 자연보호를 통한 시스템 내부의 생태적인 기능의 향상, 그리고 인접 자연생태계 및 농경생태계와의 조화로운 공동 발전을 통하여 도시시스템을 부양하는 외부 생태계의 관리로 나누어 적극적이고 생태적으로 나아갈 필요가 있다.





토론문

사회과학에서의 시스템과 상호의존성


이 상 일 (동국대학교 토목환경공학과 교수)




  개인과 사회, 행위와 구조에 관한 학문에 익숙하지 않은 토론자가 사회과학 분야 논문을 정확하게 이해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일 것이나, 오류의 가능성을 전제로 한다면 장덕진 교수의 발제문은 다음과 같은 점을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즉, 개인의 정체성과 행위, 그리고 개인들이 모여 이루어내는 집합적 특성(구조적 발현)을 이해하려고 할 때, 각각의 상호의존성을 고려하지 않고는 사회과학적 설명이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음을 지적하고 있다. 주로 경제학적 이론을 때로는 예시로 때로는 비판의 대상으로 삼으면서 인간 욕망의 내재성과 행위의 합리성 그리고 발현의 상호의존성을 역설한다. 발제자는 앞서의 사회과학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제도적 개인주의 방법론으로 연결망 분석과 에이전트 기반 모형(Agent-Based Modeling)의 결합에 기대를 걸고 있다.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은 비록 그 연구 대상은 다를지라도 ‘과학’이라는 점에 있어서는 같다. 즉, 현상을 보다 잘 이해하고 예측하기 위한 더 나은 모델을 세워나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엔 개념의 설정, 수학적 전개, 관측에 바탕을 둔 검증 등의 과정이 포함될 수 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얼핏 너무나도 멀리 떨어져 있는 듯한 두 개의 학문 영역이 사실은 매우 유사한 방법론을 활용하고 있다는 점에 놀라면서 한편으론 자연스러운 것으로 수긍하게 된다. 물론 어떤 경우엔 한쪽이 더 정교한 모형을 갖고 앞서 나갈 때도 있지만 넓게 보면 동시대에 대체로 비슷한 사조와 수준을 유지하고 발전하는 듯하며, 이는 아마도 현대의 정보화와 학문간 교류의 활성화에 크게 기인하는 것 아닌가 싶다.

  이렇게 말하는 데는 사회과학이 대상을 시스템적으로 접근하는 점에 있어서는 물론이고, 발제문에서 언급하고 있는 상호의존적 선호형성에 관한 모델, 모수적 혹은 전략적 합리성 추구과정, 발현에 있어서의 합산규칙, 자기조직성, 시뮬레이션 등의 개념과 방법론을 사용한다는 점에서 자연과학 혹은 공학과 공통된 점이 많다는 사실이 매우 흥미롭게 발견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예를 들면 Krackhardt의 선호형성 모델은 시계열(time-series) 분석에서 그와 유사한 형태를 자주 만날 수 있다. 다만, 시간 t에서의 선호가 바로 전 시간(t-1)에서의 여러 행위자들의 선호를 가중합으로 표현하는 데서 더 나아가면 그 이전 시간(t-2, t-3, …)의 행동의 영향까지 포함할 수 있는 모형의 개발도 가능할 것으로 보며, 그 같은 사례는 자연과학 및 공학에서 자주 찾아볼 수 있다. 단순화시켜 말하면 어떤 현상이나 인간의 행위를 과거 일정 시간까지의 기억(memory)의 산물로 보는 시각이라 할 수 있겠다.

  인간의 행위규칙을 설명하기 위한 틀로서의 파레토 균형이나 내쉬 균형의 예도 공학 거의 모든 분야에서 최적설계 또는 최적관리의 문제를 다룰 때 흔히 이용된다. 앞서도 말한 바와 같이 네트워크, 시뮬레이션, 자기조직 등도 여러 학문분야에서 공유하고 상호 기여하는 개념임을 확인할 수 있고, 바로 이런 점에서 우리는 학제간 관심과 교류, 공동연구의 필요성과 유용성을 확인하게 된다. 에코포럼도 그와 같은 목적에서 생겨났고 그러한 학문적 상호의존으로부터 발전적 시너지 효과를 기대하고 있는 것으로 믿는다.

  한편, 발제문은 그 논의의 범주를 사회과학의 연구방법론에 국한시킨 채, 포럼의 주 관심인 생태학의 영역과 연계시키지 않음으로써 학제간 토론의 여지를 축소시키고 있어 다소 아쉬움을 남기고 있다. 발제문에서 제시한 사회과학적 방법론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보다 구체적으로는 지속가능한 사회를 지향하는 현대인의 정체성과 행동양식을 어떻게 설명하며, 시사점은 무엇인지에 대한 언급이 있었으면 하는 바램이 있다. 혹시 그런 연구가 향후 수행되어야 하는 과제라면 방법론적 가능성의 제시라도 있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지구환경은 변하고 있으며, 그에 따라 인류가 처한 자연적, 인위적 환경도 지금까지 겪었던 그것과는 확연히 다르다. 인간은 이제 인간 중심적인 사고에서 벗어나 우리 주변의 무생물과 생물들이 우리와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관념적으로가 아니라 실천적으로 깨닫고 행동에 나서고 있다. 하천 관련 프로젝트의 예를 들어보자. 20년 전에는 홍수소통이나 물과 전기의 확보에 우선순위를 두고 ‘최적’설계를 했다면, 10년 전부터는 수질도 고려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때의 수질은 인간 중심 ─ 예를 들면 인간이 마시거나 수영할 수 있는지를 따지는 ─ 이었다. 오늘날에는 수중생물과 철새까지를 고려한 하천설계를 하고 있다. 물론 이렇게 하면 비용은 더 들지만 사회 구성원이 그것을 원하는 동시에 추가비용을 지불할 의사를 가지게 됨으로써 ‘최적’의 개념이 달라지고 그 결과가 구체적으로 현실에서 구현되기에 이르른 것으로 볼 수 있다. 추가로 소요되는 비용을 감당하기 위해서 사회는 지속적으로 성장해야 하며, 이는 기술발전과 효율성 제고를 통해 가능하다고 믿는다.

  인간이 처한 상황을 정확히 이해하고 대처하기 위해 학문도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앞서의 하천의 예에 관해 말하면 변화하는 사회적 요구에 응답하기 위해 전통적 수리학(hydraulics)이 환경수리학, 생태수리학으로 변천해 왔다. 생물과 환경의 상호작용을 다루는 본연의 생태학에 연구할 광대한 지평이 여전히 남아 있는 한편, 최근에는 산업물질대사(industrial metabolism)를 다루는 산업생태학(industrial ecology)이라는 새로운 영역도 등장하였다. 이제 ‘모든 것은 모든 것에 연결되어 있다’는 식의 추상적 담론에서 나아가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과학적 이론과 이를 바탕으로 한 실천규범이 다양하게 제시되고 검증되어야 할 것으로 본다. 그런 차원에서 사회과학 역시 더욱 정치한 이론을 발전시켜나갈 것으로 믿으며, 그 과정에서 연구 성과들이 타 학문과 생산적으로 교류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토 론 문


시스템과 상호의존성이 지니는 생태학적 함의


장 시 기 (동국대학교 영어영문학과 교수)




  I. 왜, 시스템과 상호의존성인가?


  장덕진 교수의 <사회과학에서의 시스템과 상호의존성>을 읽고, 소위 “후기근대시대(the post-modern age)”라고 일컬어지고 있는 오늘날의 사회과학에서 시스템과 상호의존성에 대한 논의가 지속적으로 변화하고 있는 근대적 학문체계의 인문학이나 자연과학과 상호 유기적으로 연결되어야만 한다는 필요성을 더욱 절실히 느꼈다. 이러한 필요성은 인문학, 사회과학, 그리고 자연과학이라는 분과학문 체계가 만들어진 근대의 역사 속에서 소위 생태학이라고 불리는 새로운 학문체계를 바라보는 공통의 시선과 차이의 시선이 무엇인가를 살필 수 있게 하고, 또한 이미 오늘날의 삶과 사유체계 속에서 하나의 굳건한 독자적 위치를 점하고 있는 생태학이 기존의 인문학이나 사회과학, 그리고 자연과학에 요구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인식할 수 있게 만들기 때문이다.

  토론의 활성화를 위하여 생태학이 요구하고 있는 오늘날의 시각에서 근대의 역사를 개괄하면, 근대는 “초기 근대(the early modern)”, “핵심 근대(the high modern)”, 그리고 “후기 근대(the late, or post-modern)”로 나눌 수 있다. 이러한 근대의 역사는 영국, 프랑스, 그리고 독일을 중심으로 한 서구세계에서 18-19세기의 “초기 근대”,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의 “핵심 근대”, 그리고 2차 세계대전 이후의 20세기 후반의 “후기 근대”로 구분할 수 있고, 한반도에 살고 있는 우리는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반(1945, 혹은 1950)의 “초기 근대”, 경제개발이나 민주주의가 발생하여 토대를 만들기 시작한 195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의 “핵심 근대”, 그리고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적 경제가 확실하게 토대를 마련한 1990년대 이후부터 오늘날까지를 “후기 근대”라고 규정할 수 있다.

  이러한 근대화의 과정에서 인문학, 사회과학, 그리고 자연과학이라는 분과학문은 정신과 물질의 이분법에서 분화하여 근대를 구성하는 각각의 개별학문으로 자리를 잡는다. 즉, “생각하는 나(thinking I)”가 주체가 되어 “생각하는 실체(thinking reality)”를 연구하는 것이 인문과학이라면, “생각하는 나”와 관계를 맺고 있는 사회적 환경(정치, 사회, 경제 등등)을 연구하는 것이 사회과학이고, 자연적 환경을 연구하는 것이 자연과학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근대의 학문체계는 정신/몸의 이분법에서 출발하여 개인/사회의 이분법과 인간/자연의 이분법으로 분화된다. 그러나 자연과학의 한 분야로 출발한 생태학이 추구하는 “생태(eco-system)”에 대한 연구는 정신과 몸, 개인과 사회, 그리고 인간과 자연이 하나의 시스템으로 작동하고 있으며 결코 서로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상호의존하면서 변화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따라서 시스템과 상호의존성을 토대로 한 생태학은 근대의 인문학과 사회과학, 그리고 자연과학에 정신과 몸, 개인과 사회, 그리고 인간과 자연이 상호의존하는 상호작동시스템에 대한 필요성을 요구하고 있다. 

  



  II. 장덕진 교수의 <사회과학에서의 시스템과 상호의존성>을 읽고


  장덕진 교수가 “새로운(근대가 아닌 탈근대라는 의미에서)” 생태학의 토대가 되는 (생태적) 시스템과 상호의존성에 대한 사회과학적 접근을 개인과 사회의 이분법 이나 인간과 자연의 이분법 속에서 인간이라는 절대적 영역에 한정시켜 놓았던 “정체성(identity)”과 개인의 영역에 속한다고 믿었던 “발현성(emergence)”에 대한 문제제기로 시작하는 것은 생태학의 사회과학에 대한 요구를 충족시킨다고 하겠다. 글의 서론에서 장덕진 교수는 전통적으로 존재론적 토대가 되는 “나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이다(I am who I am)”를 부정하고 “당신이 먹는 음식이 곧 당신이다(You are who you eat)”는 자연적 존재와 “당신이 아는 사람이 곧 당신이다(You are who you know)”라는 사회적 존재를 제시한다. 이러한 제시는 정체성과 발현성이 곧 상호의존적인 자연 시스템과 사회 시스템의 작동과정에서 드러나는 산물(products)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그러나 문제는 “정체성”과 “발현성”을 상호의존적인 에코-시스템의 작동과정으로 포착하지 않고, 정체성과 발현성을 이분법으로 구분함으로 말미암아 다시 근대 사회과학의 맹점으로 지적되고 있는 개인과 사회의 이분법으로 환원되는 환원주의의 오류를 의심하게 만든다. 이러한 의심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고자 한다.


  1. 장덕진 교수는 그 동안 개인/사회의 이분법 때문에 사회과학에서 문제시되었던 “미시/거시”의 이분법, 즉 사회현성을 설명하려는 “집합주의적 전통”과 “개인주의적 전통”을 극복하기 위하여 “제도적 개인주의”를 제시한다. <그림 1>로 설명하는 “제도적 개인주의”가 사회과학의 집합주의적 전통인 “전체적 구조주의”와 “변형적 구조주의” 뿐만 아니라 개인주의적 전통인 “기능주의”와 “심리학주의(사회정신분석학)”를 극복한다는 점은 동의한다. 그러나 “제도적 개인주의”가 내포하고 있는 “사회화”, “행위이론”, 그리고 “구조적 발현성”은 모두 미시/거시의 이분법에서 만들어진 집합주의적 전통과 개인주의적 전통의 부산물이 아닌가? 예를 들어, “사회화”와 “행위이론”은 “전체적(혹은 변형적) 구조주의”의 산물들이고, “구조적 발현성” 또한 “심리학주의”를 강조하는 개인주의적 전통의 한 산물이 아닌가?


  2. 장덕진 교수는 “욕망(desire)”의 문제를 “행위이론”으로 설명한다. “행위이론”의 토대가 되는 “최적화 행위”와 “효용극대화”에서 이야기하는 “욕망”(혹은 선호)은 “내재적(immanent)”인 것이 아니라 “외생(재)적인(exogenous)”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즉, 경제적인 “선호”나 “욕망”은 “시스템의 외부로부터 주어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규정은 경제적 “선호”를 우선시할 때 경제적 구조를 절대시하는 후기 근대의 개인주의적 전통이 제시하는 경제주의로 환원되고, “욕망” 그 자체를 우선시할 때 핵심 근대의 집합주의적 전통이 제시하는 정신이나 무의식을 절대시하는 “심리학주의”로 환원되지 않는가? 이러한 환원주의의 혐의는 정덕진 교수가 <그림 2>를 예시하면서 “외재적 선호는 내재적 선호라는 보다 일반적인 현태의 특수한 경우가 된다”라는 주장에서 더욱 드러난다. 즉, 미시/거시의 이분법을 극복하려는 노력이 특수성(미시, 혹은 개인의 내재성)/보편성(거시, 혹은 사회의 외재성)의 이분법으로 “미시/거시”의 이분법을 더욱 강화하고 있다는 혐의가 짙다.


  3. 장덕진 교수는 “행위와 상호의존성”의 관계를 시스템의 상호의존성이 아니라 개인/사회의 이분법 속에서 독자적인 개인과 개인의 관계로 파악하여 다시 경제적 효용의 극대화라는 개인주의적 전통으로 환원하고 있다는 혐의를 지닌다. 예를 들어, 장덕진 교수가 <그림 5>로 제시하는 “부부싸움게임”은 독자적인 개인과 개인은 존재하지만 가족이나 연인이라는 관계의 시스템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시스템의 상호의존성이 아니라 자본주의적 경제주의가 주장하는 “효용극대화 이론”이다. 가족이나 연인의 상호의존적인 관계 시스템 속에서 “권투”와 “발레”라는 외재적 환경은 구조주의나 경제주의에서 이야기하는 가치 결정론적으로 결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관계의 변화와 생성에 따라 가치가 발현되는 것이다. 즉, <그림 5>가 제시하는 권투와 발레의 선호도는 부부가 개별적으로 존재했던 과거의 선호도이지 관계를 통하여 형성된 둘이라는 하나의 시스템 속에서 작동하는 가치체계가 아니다. 장덕진 교수가 서론에서 제시하는 것처럼 가족이나 연인(혹은 친구)의 관계 시스템 속에서 남편이나 아내, 혹은 남자나 여자는 절대적 주체의 정체성을 지니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아는 사람이 곧 당신이다”라는 타자가 된다.


  4. 생태학이 이야기하는 시스템의 상호의존성은 근본적으로 “이자(일대 일 대응) 관계”이다. 그러나 장덕진 교수는 <그림 5>가 제시하는 주체가 부재하는 가치결정론의 한계 때문에 “진정한 의미”의 “사회”라는 상호의존적인 시스템을 “나의 상대방뿐만 아니라 제 3자까지도 고려해야만 하는” “이자(dyad)”가 아니라 “삼자(triad) 이상의 관계”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삼자(각) 관계”는 근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고착되어 있는 “아버지-엄마-나”라는 가족주의적 삼각형의 구도가 아닌가? 가족은 “이자관계”로 구성되는가, 아니면 “삼자(이상의)관계”로 구성되는가? 만약에 “삼자관계”로 구성된다면, 가족주의적 삼각형은 상호의존적인 생성적 체계가 아니라 “신-사제-신도”, “왕-신하-백성”, 그리고 핵심 근대의 “국가-정부-국민”이라는 국가주의나 후기 근대의 “자본-상품-소비자”라는 경제적 자본주의 지배나 서열 중심의 파괴적 체계가 아닌가?


  5. 장덕진 교수가 이야기하는 시스템과 상호의존성이 근대적 국가주의를 내포하고 있는 후기 근대의 경제주의라는 혐의는 근대적 국가주의의 틀 속에서 후기 근대의 다국적 기업의 강화를 위한 “노동시장의 유연화”를 주장하는 그라노베터(Mark Granovetter)의 “약한 연계의 힘”에 대한 강조에서 두드러지는 듯하다. 즉, 근대적 의미에서 한반도를 포함한 멕시코나 일본과 같은 국가적 단위의 학연이나 지연의 “강한 연계의 힘(The Strength of Strong Tie)”을 지니고 있는 핵심 근대의 국가들과 후기 근대의 자본이 지배하고 있는 다국적 기업의 미국과 같은 “약한 연계의 힘(The Strength of Weak Tie)”을 비교하여 후자의 장점을 보여주는 점에서 근본적인 생태학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시스템의 상호의존성이 아니라 미국 중심의 자본주의적 경제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경제적 시스템의 상호의존성이라는 혐의가 짙다.


  6. 이런 측면에서 그라노베터의 주장처럼 장덕진 교수는 국가주의적 체제 속에서 자라난 현재의 국가적 자원을 유지하는 “강한 연계의 힘”이 지니는 일면성을 강조하면서 다국적 기업의 지배체제로 발전한 미국 중심의 노동시장에서 더 나은 일자리와 새로운 자원을 얻는데 필요한 창조성과 유연성을 지닌 미국식 “약한 연계의 힘”을 상대적으로 긍정하는 것이라고 본다. 따라서 장덕진 교수가 <그림 6>을 예시하면서 제시하는 학습의 “행위나 선호는 시스템 외부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시스템에 대해 내생적이며, 이들의 운명은 철저하게 상호의존적으로 결정된다”는 결론은 장덕진 교수의 의도와는 달리 국가와 자본을 절대적인 제 3자로 규정하는 집합주의적 전통과 개인주의적 전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다. 이런 측면에서 장덕진 교수는 생태학이나 생태학적 인문학이 이야기하는 관계(시스템)의 상호의존성이라는 “1+1=not 2 but 3(multitude)”의 “합산규칙”을 찾지 못한다. 이런 측면에서 “부익부 빈익빈”이라는 “불평등”의 “자본주의적 속성”을 시스템의 영속적이거나 절대적인 요소로 받아들이려는 “ABM(Agent-Based Modeling)”의 “사회과학적 시뮬레이션”도 근대적 사회과학의 “제도적 개인주의”의 한 요소는 될지언정 생태작 시스템이 상호의존성에 도달하지 못한다고 본다.




  III. 발전적 논의를 위한 제언


  장덕진 교수에 의하면, 근대적 사회과학의 전통으로 자리 잡고 있는 미시분석과 거시분석을 결합하려는 “제도적 개인주의”는 개인과 개인 차원의 상호의존성 뿐만 아니라 개인과 제도(혹은 사회) 차원의 상호의존성을 부각시키고 있다. 그러나 논문의 말미에서 암시하고 있듯이 “제도적 개인주의”의 사회과학적 방법론은 아직 해결해야 할 난제들을 남긴 채 미완으로 끝나고 있다. 필자는 그 “미완”의 요소가 바로 “제도적 개인주의”가 다른 사회과학적 방법론처럼 개인과 사회라는 근대적 이분법에서 완전하게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거시=전체’나 ‘미시=개인’은 “개인/사회”의 근대적 이분법이다. 이런 측면에서 생태학적 시스템의 상호의존성이 이야기하는 “전체 = 개인들의 총합+α”에서 사회과학자들이 찾으려는 문제의 “α”는 항상 이상/현실의 이분법처럼 초월적이고 절대적인 것으로 신비화시키거나 경제적 현실주의 속에서 은폐되기 마련이다.

  근대적 의미의 자연과학의 한 분야에서 출발한 생태학이 근본적으로 개체의 생명성을 탐구하는 미시분석을 토대로 하듯이, 들뢰즈(Gilles Deleuze)의 미시분석은 사회에 대립하는 개인이 아니라 전체를 구성하는 “부분대상(the partial object)”이거나 “무리(band)”라는 집합체를 관통하는 “분자적 흐름”이다. 따라서 사회적으로 드러나는 “욕망”은 개체의 욕망이 아니라 개체들을 관통하는 “사회적 욕망”이다. 국가주의에서 살고 있는 우리는 국가주의적 욕망만을 관찰할 수 있으며, 자본주의에서 살고 있는 우리는 자본주의적 욕망만을 관찰할 수 있을 뿐이다. 이런 측면에서 “당신이 먹는 것이 바로 당신이다”와 “당신이 아는 사람이 바로 당신이다”라는 후기 근대의 정체성은 핵심 근대의 정체성과 다른 사회적 욕망의 한 자현이지 존재 그 자체의 욕망은 아니다. 개체와 전체는 하나의 “욕망기계(desiring machine)”라는 점에서 동일하다. 즉 미시적이든지 거시적이든지 간에 모든 존재는 욕망기계이다.

  이런 측면에서 장덕진 교수가 제도적 개인주의의 모델로 제시한 <그림 1>에 나타나는 "b-c-d"의 미시적 과정을 하나의 전체로 인식하는 “욕망기계(desiring machine)”로 파악하는 것이 어떨까 하는 생각이다. 즉, “A(W)”라는 자본주의적 영토는 사회적 욕망의 생산이라는 “b”의 “사회화(정체성 형성)”의 과정을 통하여 “a(e)”라는 자본주의적 욕망의 존재를 생산하고, “a(e)”라는 자본주의적 욕망의 존재는 “c”라는 욕망의 “행위규칙”의 과정을 통하여 “B(e)”라는 또 다른 욕망의 존재로 변형되어, “d”라는 “합산규칙”의 과정을 통하여 또 다른 영토인 “B(W)”의 영토로 재영토화 한다. 들뢰즈는 “a(e)”를 포함한 “A(W)”를 알튀세르가 사회화라고 이야기하는 것과 동일한 영토(화)라고 말하며, “a(e)”가 “B(e)”가 되는 행위규칙을 탈영토화라고 말하고, “B(e)”가 “B(W)”가 되는 “d”의 합산규칙을 재영토화라고 말한다. 이런 측면에서 “먹는 것(what you eat)”과 “아는 사람(who you know)”이 끊임없이 변화하는 사회적 존재는 고정된 정체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 생명성이라는 상호의존성의 관계적 욕망에 따라 끊임없이 “탈영토화와 재영토화의 과정(the process of deterritorialization and reterritorialization)”을 지속하는 “욕망기계”라고 이야기한다.